엄마의 장례식
20년의 병환 끝에 엄마는 세상과 이별을 하셨다.
오랜 병환을 거치면서 엄마는 세상에 대해 많이 부정적이셨다.
1남 4녀를 잘 기르시느라 고생도 많이 하고 즐거운 일만 가지고 싶으셨던 시기가 병고로 고생을 하셨으니...
그래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의 마지막 모습은 편안하였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중환자실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할 수가 없어
5인 병실을 통채로 빌려 온가족이 간병인이 되어 함께 간병을 했다.
함께 엄마와 마지막을 하였던 시간.
엄마, 엄마를 혼자 두지 않고 여기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요양병원으로 모셔와서 좋지요?
인공호흡기로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의식은 끝까지 놓지 않으셨던 엄마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셨다.
임종을 앞두었다는 말에 온가족이 모이기를 2-3번.
마지막 기도 삽관으로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와 끊임없이 해야 하는 석션의 괴로움으로 보여주던 몸부림,
퉁퉁 부은 손과 발을 끊임없이 주물러도 소변이 배설이 되지 않아 터질 듯한 관들의 압력으로 흔들렸던 몸.
진통제가 아니라 마약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통증을 고스란히 몸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 편안히 가셔요.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애닯아 울며불며 엄마, 엄마를 외치는 막내동생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다.
나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본다.
부정하고 싶어도 엄마의 모습에 있는 나의 모습.
3일장 치루면서 내내 나는 나를 들여다 본다.
아버지, 시아버님, 시아즈버님의 상을 여태 치루었고 작년에도 상을 치루었었다.
초상도 이제 익숙해질만한데도 엄마의 초상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다.
그 전에는 상이 나랑은 먼나라 다른(?) 사람 이야기로 느껴졌다면 내 일로도 다가온다.
코로나19의 대규모 확산이 닥쳐 4단계가 시작되면서 친족 49명 이하만 참여할 수 있었다.
장례식에는 사람들은 올 수 없으니 조화만 속속 도착한다.
조용한 장례식.
식구들끼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슬픔을 나눌 수 있었다.
그래. 우리는 또 살아야 한다.
아니 더 잘 살아야 한다.
엄마의 마지막 고통시간은 우리와의 이별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잃고 난 후에야 가지고 있는 것의 아름다운 모습을 알게 된다.
맛난 음식의 냄새를 맡고 먹고 배설할 수 있는 것,
쏟아지는 햇살 사이를 걷고 움직일 수 있는 것,
그 빛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시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리기 전에 열심히 즐겨야 한다.
엄마. 내게 사랑스런 동생들을 주고 가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도 이제 아프지 마시고 행복한 시간을 가지셔요.
엄마는 아버지가 모셔진 용인 공원묘지로 이동하였다.
7월의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는다.
열정적으로 살았던 엄마의 모습 같다.
용인 공원묘지에서 가까운 우리집에서 모이려고 했는데 그도 어렵다.
코로나 4단계로 가족끼리의 모임도 불가능하단다.
근처의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