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방

봄날 서울 걷기

임성숙 2019. 3. 16. 22:43


손혁재 선배님이 가끔 걷기 모임을 하신다는 이야기에 한 번 참여해야지 했는데 그 번개모임에 초대해주셨다. 

몸을 움직이면서 우리나라의 좋은 곳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모임이 좋아보였다.

지난 주에 참여해보려고 했었는데 결혼식도 있고 친구가 오는 바람에 참여해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주에도 번개모임이 있다는 말에 선뜻 가기로 결정하였다.

월요일에 대한민국 스승상 2배수에 선정되어 실사가 나오기로 한 상태라 좀 바쁘기는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언제 안 바쁜 적이 있었나?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전에는 엄마에게 가서 같이 점심까지 먹고 난 후에 오후 2시에 광화문 교보문고로 갔다.

동문들만 오시는 줄 알았더니 손혁재선배님 지인분들이 오셨다.

처음에는 낯설거라 생각하였는데 막상 만나니 편안하고 좋은 분들임을 느꼈다.

학교와는 다른 세계에 사시는 분들과 같이 걷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나름 재미있었다.

중간중간 손선배님의 역사해설을 듣는 것은 행운이었다.

서울서 태어나 자라난 나로서도 전혀 몰랐던 서울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걷는 것을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4시간여 걷는 거리가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걸어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수다떨면서 해설도 듣고 중간에 떡볶이 간식도 먹고 저녁식사로 맛난 보리굴비 정식도 먹으면서 만족스런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선생님의 오늘 봄날 서울 걷기 해설도 카톡으로 올려주셨다.

우아~ 대단... 내가 걸었던 길에 대한 이야기들이라 글들이 그대로 쏙쏙 들어온다.


<봄날 서울 걷기에 대한 선배님의 해설>

띠뜻한 봄날 서울 창신동, 숭인동 지역을 걸었습니다.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본관 여산, 정읍 태생)의 흔적을 찾아 걸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비입니다. 영의정의 손녀로 세자비로 간택되어 왕비가 되었다가 단종이 쫓겨나면서 대비가 되었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군부인이 되어 쫓겨났고, 친정마저 풍비박산되었습니다. 단종이 죽임을 당한 뒤 노비가 되었습니다. 15세에 왕비가 되었던 송씨는 18세에 노비가 된 뒤 82세까지 살았습니다.

청계천 7가쯤에 있는 영도교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살아서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정순왕후 송씨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 정업원(왕이 죽은 뒤 궁에서 나온 후궁들이 여생을 보내던 곳)에서 시녀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청룡사에는 이곳이 정업원 옛터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세조가 준 집과 식량 등을 끝내 받지 않은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다가 송씨를 불쌍히 여긴 근처 마을의 여인들이 송씨에게 식량이며 반찬 등을 주기 위해 만나던 곳이 여인시장입니다. 여인시장은 지금의 동묘시장(벼룩시장)과 영도교 사이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문화 학력인정 대안학교인 서울다솜관광고등힉교 저리가 여인시장이었다고 합니다. 낙산 기슭의 명신초등학교 옆에 있는 비우당(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쓴 실학자 이수광의 집) 뒤에 있는 자주동샘(또는 자지동천)은 송씨가 염색을 하던 곳입니다. 자주동샘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만나기로 한 교보문고 앞에는 봄 햇살이 노니고 있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옆에 있는 기념비전에 대한 해설에서 봄날 여행이 시작된다.

기념비전 안에 있는 비석은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02년 당시의 황태자였던 순종이 세운 비석으로서 '고종즉위 40년칭경기념비'이다.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에는 본래 각(閣)이라는 명칭이 붙어야 하지만 고종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전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기념비전(碑殿)은 궁궐 건물과 같은 위상을 갖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1969년 7월 28일 사적 171호로 지정되었다.

* 참고로 건물의 권의에 따라 명칭은 전-당-합-각-재-헌-루-정 순으로 분류된다.



 기념비전의 출입구인 만세문(萬歲門)은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기위하여 만세문이라고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만세문은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으로 팔려가 어느 가정집의 대문으로 사용되다가 1954년 현재의 자리로 돌아왔으며 한국전쟁때 파손된 부위는 1979년 복원되었다고 한다.



기념비전 안쪽에는 ’도로원표’가 있는데 서울에서 지방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되는 위치이다. 도로원표는 1914년 설치된 당시에는 현재의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였으나 1935년 기념비전 안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도로원표에는 서울에서 부산, 목포, 대전 등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가 기록돼 있다. 



광화문 광장 앞에는 태극기 부대가 엄청 많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진 분이 많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TV에서 보기는 했었지만 청와대 바로 앞에서 시위대(?)들이 점령하여 시끄럽게 확성기 소리에 자기 주장에 열심인 사람들이 보인다.

좀 슬픈 생각도 들고 외국사람들 다니는데 창피한 생각도 든다.

태극기와 성조기들이 의미없이 흔날리는 느낌....







봄 날 걷기는 청계천 걷기로부터 시작하였다.



청계천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개천에 동전을 던지면 모아서 전세계 교육지원사업에 쓰인다고 한다.




이렇게 청계천 거리를 걷는 것은 처음인 듯하다. 또 언제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버들, 개나리들에서 보이는 봄의 흔적들도 아름답다.    













가다보니 익숙한 이름의 방산시장이라는 상호가 보인다.

청계천이 과거에는 소를 많이 기르다보니 오물들이 많아서 흐름이 막히곤 했었단다.

그래서 개천 안에 있는 오물들을 양쪽으로 퍼올렸는데 냄새가 너무 나서 안좋았단다.

그래서 그 오물들의 산에 복사 꽃들을 심었는데 꽃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꽃산에 시장을 세웠다고 해서 방산 시장이라고 한단다.

지금 이 시장에서는 포장재 및 인쇄물을 비롯한 인테리어기기 등을 판다고 한단다.




청계천에는 오리랑 물고기도 있어 신기했다.









청계천을 걸어 황학동 거리로 갔다.

황학동거리 건너편에는 영도교가 있다,

정순왕후가 단종과 헤어졌다는 사연깊은 다리...

이 다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시장거리가 되었다.




황학동거리에는 다양한 물건이 가득하여 걷는 것 자체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시장 안 쪽에 우리나라 최초의 다문화 학력인정 대안학교인 서울다솜관광고등힉교가 있는데 이 자리가 여인시장 자리였다고 한다.














청계천거리를 지나다보니 다리를 잠깐 쉬게 하기 위해 떡볶이 간식을 먹고는 숭인동 거리 뒤의 창신동거리로 올라간다.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송씨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정업원 부근의 큰바위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면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뜻의 동망봉이라는 봉우리 옆의 정자인 동망정이라는 정자가 보인다.

 












 










낙산 기슭의 명신초등학교 옆에 있는 비우당(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쓴 실학자 이수광의 집) 뒤에 있는 자주동샘(또는 자지동천)은 송씨가 염색을 하던 곳입니다. 자주동샘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 걷기가 끝난 후에는 종로에 있는 일식집으로 가서 맛난 저녁을 먹으면서 행복한 마무리를.....

다음에 또 만나기로 기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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