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엄마의 입원

임성숙 2018. 7. 28. 08:41

 

15년째 아픈 엄마.

사실 엄마가 아프다고 해도 이제는 무덤덤하다.

또 아프시구나.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자존심이 유난히 세셨던 엄마. 딸인 나하고도 경쟁심 같은 것을 느끼시던 엄마.

그런 엄마가 무척 부담스럽다 못해 피곤하게 느낄 때가 많았다.

남들은 엄마하면 눈물이 나고 사랑이 넘친다고 하던데 .....

나는 그러지 못해 불행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이제는 나도 엄마가 되고 손자까지 생길 나이가 되어 보니 엄마가 이해가 되고

엄마에게 잘해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빠와 살면서 자식 다섯을 다 대학까지 교육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사실 난 아빠를 더 좋아했고, 아빠도 나를 많이 아끼셨다. ) 

마음처럼 자식들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다독거려주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세상에 자식에게 못해주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나도 아들이 내게 따스한 눈빛으로 봐주면 얼마나 행복한가?

생전 마음 고생시킨 적이 없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변호사까지 되어준 아들을 보면 감사한 마음이다.

그래. 나는 이제 내가 받은 것들을 돌려드릴 때가 된 것이다.

 

마침 방학이기도 해서 엄마가 드실 반찬 준비해서 병원에서 이틀을 보냈다.

그런데 병원을 가는 순간부터 엄마하고의 관계는 다시 피곤해진다.

수원서 서울까지는 길이 많이 막혀 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

일반 음식을 거의 안 드시는 엄마에게는 도대체 해드릴 반찬도 없다.

고기도 안 드시고, 심지어 일반 양조간장이 들어간 음식도 못 드시는 분이다.  

드실 반찬을 고민하여 감자, 양파, 오이고추 볶음, 감자국, 무나물, 호박부침, 삶은 양배추 등을 만들어  

두 가방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

병원 밥도 안드셔서 식을까봐 가기 전에 밥한 것을 싸가지고.....

그런 내게 '고생했구나. 참 맛있다.'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난 밥 먹었다. 네가 만든 반찬은 네가 도로 싸가지고 가서 먹어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기분나빠 하시는 말이 아니다. 엄마의 평상시 말버릇이시다. )

생각 같아서는 그냥 돌아 나오고 싶어진다.

그리하면 엄마는 서운해 우신단다.

나중에 보면 내가 만든 반찬을 펼쳐놓고 자랑삼아 드시기도 한단다.

오지 말라고 해서 정말 안 가면 자식 다섯 다 길러봐야 소용이 없다고 또 우신단다.

되었다 해도 엄마 이것 좀 드셔보셔요? 그래도 엄마 보고 싶어 왔어요. 하고 말해주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당신은 분명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자식들이 그냥 굳이 왔다 하는 식의 사고를 하고 싶은 것이다. 헐~

그것도 치매의 일종이라고 하기는 한다.

 

어렸을 적에는 엄마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을 만나신 후,

선생님께서 내가 잘하는 것이 엄마가 학교를 찾아간 덕이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생각해보면 아직 개발상태에 있던 우리 나라에서의 뇌물도 통했고 적당주의도 통했기에 그당시 엄마말도 맞을 수 있지만 딸에게 그리 말하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나는 부모님 덕을 별로 받지 않고 내 힘으로 대학도 갔고 힘들게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당시 공부를 잘하는 편인데 상업학교인 서울여상을 가라고 하여서 

내가 줏어온 딸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고등학교 때 혈액형 배울 때 아버지가 다른 곳에서 만든 딸이 아닌가 의심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업한다고 여기저기 사고를 쳐서 다 망해서

단칸방으로도 이사를 갈 정도였으니 내게 정상적으로 인문계를 진학해서 대학을 가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동생들이 넷이나 되었으니...

 

나와 엄마는 많은 점이 달라서 만날 때마다 많이 싸우기도 했었다.

딸하고 엄마하고는 사이가 좋다고 하는데 난 엄마에게 그리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지 못했다.

15년 전, 자궁암 초기로 수술을 하면 간단하게 낫는다고 해서

수원 아주대학교로 모시고 와서 수술을 했었다.

아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리고 고3담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새벽에 밥해서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학교 근무하고 또 퇴근해서 밥 만들어 저녁에 가고...

밥해서 가면 너 때문에 수원으로 왔더니 나를 이리 버려두고 밤이나 되야 삐죽 얼굴 보여준다고 또 우셨던 엄마.

거기다 수술후 후유증이 심해 소변주머니를 달고 사시던 엄마, 죽고 싶다고 우시던 엄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엄마는 강인하다는 생각을 한다.

소변주머니를 달고 이제 오래 못 사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혼자서 서울대를 찾아가 죽어도 좋으니 소변주머니를 빼달라고 읍소를 해서

소장의 일부를 방광으로 만들어 소변주머니를 제거했었던 것이다.

그리고도 소소한 병들은 있었지만 정상적인 생활도 하여서

우리 전원주택에도 가셔서 쑥도 캐시고 나물도 캐시는 시간도 있었다.

자식들 신세 안 끼치고 노후를 보내겠다는 의지는 아주 높이 살만하다.

 

그러다 콩팥이 한쪽은 다 망가지고 한 쪽은 20%밖에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엄마에게는 충격이었으리라

그래서 부인하고 싶어서 우리들이 콩팥의 콩 자만 이야기를 해도 화를 내신다.

콩팥은 멀쩡하다. 지나가던 행인이 하이힐로 밟는 바람에 다친 것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 이렇게 다리가 붓게 된 것이다.

엄마, 그럼 나머지 다리는 또 왜 그렇게 되셨는데?

그건 허리가 조금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의사가 주사를 잘 못 놓는 바람에 신경을 건드려서 그리 된 것이란다.

그냥 엄마 말을 들어드리자 하면서도 나는 그게 잘 안된다.

병원에서는 골다공증이 심해져서 허리뼈에 금이 가서 보조기를 차고 있다가 주사치료, 안에 시멘트 같은 물질을 넣어 붙인다고 한다.

게다가 갑자기 왠 당뇨수치, 콩팥 수치까지 아주 안좋단다.

엄마도 대강 느끼실텐데도 엄마는 자꾸 퇴원을 하시겠단다.

자신은 집에 가서 쉬면 낫는 병이다 라고 고집하신다. 병원에 있으면 병을 만든다고 하신다.

 

엄마, 엄마가 의사에요? 제가 의사에요? 수치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지. 엄마가 왜?

엄마, 콩팥을 치료 안하면 나중에 혈액투석해야 하고 그러면 돈도 많이 들고 힘도 많이 들어요.

최소 일주일에 두 번은 병원에서 살아야 해요.

엄마는 고집불통인 아이가 되어  퇴원수속을 받는단다.

옆에 간호하던 동생을 간병인이라고 말하고, 나는 보호자가 없다고 퇴원수속해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사실 거의 포기 상태였는데 동생들이 와서 엄마를 달래서 보조기치료까지는 받기로 했다고 한다.

 

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을 예정이다.

다음주는 월화는 융합프로젝트 연수, 수목금은 창의재단 연수가 예약되어 있다.

수요일에나 가볼 생각이다. 마음이 갑갑하다.

피곤이 몸을 덮친다. 피곤의 종류가 너무 갑갑하다.